자연사랑/나라사랑
4대 문과 4 소문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한 한양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 해당되는 곳에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도읍의 기본을 갖췄다. <한양 도성의 4대문과 4소문의 위치>
4대문
1. 흥인지문(興仁之門)
한양 도성의 동대문이다. 인(仁)은 동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인(仁)'이 붙었다.
▲ 도성의 동대문인 흥인지문, 보물 제1호
다른 문의 이름들과는 다르게 이름이 네자인 것은 동쪽의 산인 타락산이 산의 지세가 약해 산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지(之)'자를 더했다고 한다.
(참고 사항 : 옛 한양을 안쪽에서 둘러싼 4개의 산을 內四山이라고 부른다.
동 : 타락산, 서 : 인왕산, 남 : 목멱산, 북 : 북악산이다.)
다른 4대문과는 다르게 성문에 옹성을 둔 것이 이러한 이유때문이라고 한다.
한양 도성의 서대문이다.
'의(義)'는 서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의(義)' 자가 붙었다.
한양 도성의 4대문들 중 가장 많은 수난사를 가진 문이다.
처음에는 돈의문이라고 이름지었는데 태종 13년(1413)에 풍수설을 받아들여 돈의문을 폐쇄하고 새로 문을 내고 이름을 서전문(西箭門)이라고 불렀다. 경희궁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 돈의문(敦義門)은 일명 서대문(西大門)이라 하며 1915년 헐림
그 뒤 세종 4년(1422) 도성을 새로 고칠 때 서전 문을 헐어 버리고 지금의 서대문 마루턱에 새 문을 세웠는데 이름을 다시 돈의문으로 부르게 되었다.
세종 이후 돈의문이 새로 지은 문이라고 하여 새문, 혹은 신문(新門) 부르게 되었고, 지금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3. 숭례문(崇禮門)
한양 도성의 남대문이다. '예(禮)'는 남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예(禮)' 자가 붙었다.
▲ 화려했던 숭례문의 모습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숭례문의 현판은 태종의 큰아들 양녕대군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물론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주장도 있다.
숭례문의 현판은 다른 대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숭례문의 이름에 들어있는 '예(禮)'는 오행 중에서 '화(火)'에 해당되는데, 서울의 남쪽 관악산(서울의 외사산(外四山) 중 남산에 해당된다.)의 모습이 불꽃 모양이 아닌가? 거기에 가까이 있는 목멱산(남산의 옛 이름)에는 불에 잘 타는 나무(木)가 들어 있으니.... 이에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서 글씨를 세로로 길게 늘어뜨려 성문 밑을 막고 누르면 화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훈민정음'과 같은 자랑스런 문화재가 있음에도 성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한 이유 때문이었다.
4. 숙정문(肅靖門)
한양 도성의 북대문이다. 본래 북쪽에 해당되는 것은 '지(知)'인데, '꾀 정(靖)'자를 사용하는 변화를 시도하였다. 숙정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 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 음기가 강한 북쪽에 있다고 해서 항상 닫아두었다고 전한다.
숙정문도 많은 사연을 가진 문이었다. 태조 4년(1395)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태종 13년(1413)에 최양선이 주장한 '백악산 동령과 서령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되다'는 의견에따라 창의문(자하문)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두었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이고 남은 양인 까닭에 가뭄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돋우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전하는데,그것은 숙청문이 여자의 방위인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북쪽은 음의 기운이 강한 곳이다.)
항상 닫혀 있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숙정문을 대신하여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4소문
1. 혜화문(惠化門)
한양 도성의 동소문이다. 본래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고 하는데,창경궁이 세워지면서 동문의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고 짓는 바람에 중종 6년(1511)에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다보니 동소문인 혜화문이 북대문의 역할까지 맡아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던 문이었다고 한다.
한양 도성의 남소문이다.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렀으며,도성에서 죽은 사람들의 운구 행렬이 이 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다고 해서 시구문(屍柩門)이라고도 불렀다.
<한양 도성의 남소문이었던 광희문, 사방으로 길이 뻗친 가운데에 서 있어 애처롭다.>
1915년에 자연 붕괴 되어 아래 부분의 석물 부분만 남아있었는데, 1970년대 후반 현재와 같이 복원되었다.
3. 소의문(昭義門)
한양 도성의 서소문이다. 소덕문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한양 도성의 서소문이었던 소의문,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었고 지금은 사진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대강 알 수 있을 뿐이다.
4. 창의문(彰義門)
한양 도성의 북소문이다. 고양군, 양주군 방면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며,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한양 도성의 북소문이었던 창의문, 자하문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태종 16년(1416)에 이 길을 통행하면 왕조에 불리하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문을 닫아 두었다가, 중종 원년(1506)에 다시 열었다고 한다.
구분 | 방위 | 문이름 | 문화 가치 |
위치 | 용도 | 내용 |
4대문 | 동 | 홍인지문(동대문) | 보물1호 | 종로 6가69 |
동쪽 관문 | 기가 적어 왜구침입이 잦아 명칭에 산맥의 뜻 지(之)를 넣다고 함 |
서 | 돈의문(서대문) | 종로구 신문로2가 |
중국과의 관문 |
일제 때 철거 | ||
남 | 숭례문(남대문) | 국보1호 | 남대문로 4가29 |
한양의 관문 |
궁궐에 직면한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기 위하여 현판을 세로로 썼다함 | |
북 | 숙정문(북대문) | 사적10호 | 삼청동 산2-1 |
평상시 닫침 |
문을 열어놓으면 음기가 침범,풍기문란으로 폐쇄 | |
4소문 | 동북 | 혜화문(동소문) | 성북구 동소문동 |
양주,포천의 관문 |
일제 때 철거후 1994년 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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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 | 광화문(수구문) | 중구 광희동 |
시신을 성밖으로 내 보내던 통로 |
1975년도 복원 | ||
서남 | 소의문(서소문) | 중구 서소문 |
일제 때 철거 | |||
서북 | 창의문(자하문) | 종로구 청운동 |
북대문 역활 | 1958년 보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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